신앙과 종교

2014. 12. 28. 13:39일상

지금까지 누가 뭐래도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아왔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에서 작은 어려움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금의 내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재수를 하고도 다시 기독교 학교로 들어간 것도 어쩌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고, 늘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 것도 다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던 영향도 있었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나간 것이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의 머릿속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자리잡았다. 심각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의심하지도 고민해 보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 러셀의 에세이를 접하면서 나의 하나님은 신앙인가 종교인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신앙과 종교, 예전부터 이 둘은 완전히 별개로 구별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단지 종교의 한 종류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을 의지해서 구원을 믿는 신자에게 기독교는 종교 이상의 신앙이다. 나에게 기독교는 종교인가 신앙인가? 구원에 대한 복음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한 것은 러셀의 글이 결정적이다.

러셀은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러셀은 기독교인이라 하려면 두 가지에 대한 분명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교리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 영생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제1원인론이 그 하나이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것에도 원인이 있을 것인데, 결국 하나님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이 존재하는 원인은? 그저 세상이 항상 그렇게 존재해 있었다고 해서 안될 이유는 없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둘째, 자연법칙론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상기하면 이러한 자연법칙은 누군가 절대자에 의해 부여된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뉴턴법칙도 아인슈타인에 의해 변경되게 되었고, 만약 하나님이 부여했다 하더라도 왜 다른 법칙은 없는 것인가?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이 아닌가? 셋째, 목적론이다. 즉, 세상 만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꼭 맞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절대자에 의해서, 그렇다면, 우리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 KKK, 파시스트는 도대체 무엇인가? 넷째, 신성을 위한 도덕론이다. 이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칸트는 지적 차원에서는 회의적이었으나, 도덕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했다. 오직 선한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다고 말하려면,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한다. 다섯째, 불의치유론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세상은 불의가 존재하므로 이런 지구 상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정의가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이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내세는 바로 정의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의 불의를 통해 정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계가 정의로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러셀은 예수 그리스도의 결함도 지적하고 있는데, 이 부분도 흥미롭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최선, 최현의 사람이었나 하는 문제에 대해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옳은 말씀이나, 보통 사람이 살면서 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복음서에 의하면 당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죽기 전에 재림할 것을 믿었으나 아직까지 재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지옥을 믿고 있었다. 진정 자비심이 있는 선한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 있을까? 

러셀 자신도 자신이 지적한 지적 이론은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 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다.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에 있다고 본다.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큰 형님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종교를 믿음으로써 덕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들은 마녀사냥이나 고문같은 끔찍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 러셀은 오히려 과학이 기독교, 교회에 맞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발로 서서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이 창조할 미래가 죽은 과거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고 말한다.

나 또한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교회에 대한 실망감을 많이 느꼈다. 아직도 많은 교회와 목사, 성도들은 약자의 편에 서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약자에 맞서 강자를 옹호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도 교회나 기독교인이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가톨릭의 사회 참여는 기독교 교회의 비겁하고 비도덕적인 면과 대조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교회가 진보를 저해해 왔다는 러셀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늘 교회에서 듣던대로 문제는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일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나 스스로 절절히 체험한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신앙으로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을 것이다. 예전에 알던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언제나 한결같이 자신을 위로해 줘서 감사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통해 위로받은 적이 많았지만,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한 엄마가 날 위로해 주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크게 달랐던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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