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지배 사회

2025. 3. 10. 07:58읽을거리

모처럼 공감하게 되는 책을 만났다.
유전학자인 저자, 최정균은 기독교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유전자에 대한 과학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기독교의 의미에 대한 메시지가 핵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지막 6장의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대해 너무나 무리수를 둔 얘기이고, 동의할 수 없다는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내가 들었던 목사님들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포리즘으로 가득 찬 성경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정신이고, 그것의 핵심 가치는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인간이 바로 창조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신성은 어떤 절대적인 초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류 공동체로서만 발휘될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유전자 지배 사회"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는 이미 반쯤 그 생명을 잃은 기존의 기독교를 완전한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진화적 본성의 하나로서 발현된 인간의 종교성은 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해 그것을 세상과 고립된 괴물과 같은 교리로 둔갑시켰다. 종교적 장식으로 치장된 이러한 기독교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보면, 구약성서에 담긴 히브리 세계관과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과 행적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아도 매우 급진적이며 현대사회에도 충격을 줄 만한 생생한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p. 17)

 

1장 가정: 사랑이라는 자기 기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고귀하지도 신성하지도 않다. 남녀 간의 사랑도, 심지어 부모의 자식 사랑도, 모두 포괄 적합도 최대화의 원리에 따라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번식시키기 위한 진화적 전략일 뿐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관찰되는 자발적 유산이나, 인간 사회에서 흔히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부모의 자식 살해는 투자 가치가 높은 자식만을 남기고자 하는 부모들의 가차 없는 선택의 결과다. 원시적인 수렵채집 사회나 농경 사회에서는 남아에 비해 쓸모가 덜한 여아가 주로 살해의 희생양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경제적 형편에 따라 아들이나 딸에 대한 선호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 발현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섹스'라고 부르는 유성 생식은 자손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화된 짝짓기 전략으로서, 호르몬의 불장난과 유전학적 차이의 매력에 이끌려 맺어지는 이 관계의 대부분은 결국 불행한 결혼 생활로 종결된다. 이렇게 가족 혹은 혈연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냉정한 진화적 계산이나 기만 등은 모두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유전자의 명령에 따른 과정에서 벌어진다. 현대사회, 특히 한국과 같은 경쟁 사회에서 갖가지 불행을 초래하는 과잉된 교육열이나 능력주의 문화 역시 결국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유전자의 번식 욕구에 기인한다.

 

2장 사회: 혐오로 가장된 두려움

사랑이 유전자의 '번식'을 위해 '혈연'을 향해 '조건적으로' 발휘된다면, 혐오는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타인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행사된다. 혐오의 진화적 근원은 유전자의 두려움이다. 병을 옮기거나 유발할 수 있는 대상을 기피하기 위해 진화적으로 발달한 행동면역계의 반응은 인간을 대상으로도 동일하게 발현된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인간상은 광범위하다. 이민자를 비롯한 다른 인종의 사람들, 각종 장애나 기형, 심지어 비만과 같은 정상에서 벗어나 보이는 겉모습을 가진 이들, 동성애자를 비롯한 다양한 성소수자들이 현대사회에서 주된 혐오의 대상이다. 특히 동성애는 스스로가 선택한 성적 취향이라는 흔한 오해와 달리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형질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도체라는 뇌 기관은 교감신경을 통해 혐오라는 두려움의 감정을 주관한다. 그리고 이 정서적 반응은 결국 우리의 인지 기능까지 지배해 고정관념, 편견, 차별 그리고 공격성의 원인이 된다. 각 사람을 개성있는 고유한 개체가 아닌 인종과 같은 특정한 부류로 무조건적으로 재빠르게 분류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침팬지와 인간 집단에서의 연구 결과는 공격성이 문명의 산물이 아닌 자연적 본능의 결과임을 말해준다.

 

3장 경제: 자본주의 세상의 번식 경쟁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은 독립적인 경제 주체들이 각자의 합리적인 욕구에 따라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장이 자연적으로 균형 상태에 도달하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적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학적 인간들의 경제 행동을 반영하지 않은 잘못된 가정에 기반해 있다. 무한한 번식 욕구와 경쟁심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학적 소비자들의 한계효용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번식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값비싼 신호를 과시하는 동물적 본능은, 과시적 소비의 형태로 현대인들의 경제활동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번식을 위해 필요한 자원 획득 경쟁도 마찬가지다. 생태학에서 정의되는 간섭 경쟁과 착취 경쟁은 인간 경제에서 독점과 착취로 나타난다. 특히 부동산, 주식, 대중 예술과 스포츠, 그리고 이른바 '혁신' 기업들의 시장에서 지대라는 형태로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가치 착취 행위는, 그저 운 좋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다른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빼앗는 생태계 경쟁의 모습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집단이 아니라 개체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원리는 착취 행동에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나 홀로 사회'를 초래했는데,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런 착취 개념을 정의조차 하지 못한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불균형으로 붕괴되어 가는 자본주의 세계를 목도하고 있다.

 

4장 정치: 자연스러운 보수, 부자연스러운 진보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상식선에서 어림짐작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의는 모호하기만 하다. 경제, 교육, 외교, 사회, 과학기술, 종교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두 진영의 입장을 분석해 보면, 보수는 전통을 옹호하고 진보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사전적 정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관적이고 내재적인 공통의 신념 혹은 가치관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뇌과학 및 유전학에서는 인간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미치는 생물학적 요인들에 대한 연구가 이미 많이 이루어졌다. 먼저 편도체와 교감신경의 높은 활성은 주로 보수 성향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성 체제를 정당화하는 심리를 설명해 준다. 편도체 기능과 유전학적으로 연관된 호르몬인 세로토닌은 사회 위계질서 확립과 서열 향상을 꾀하는 행동을 촉진한다. 진보 성향을 대표하는 도파민과는 달리, 세로토닌의 활성은 진화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해 왔다. 또 다른 요소는 짝짓기와 관련된 다양한 행동의 기저에 있는 페로몬과 그 수용체다. 실제로 보수층에서는 생애 번식 성공률 지표가 높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생물학적으로 정의할 때, 보수란 성공적으로 진화한 유전자들의 발현이자 자연이라는 원초적인 체제에 대한 정당화이며, 진보란 진화로부터의 일탈이자 자연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다.

 

5장 의학: 아프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이유

유전자는 이기적이다. 그러나 이기성이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은 아니다. 그저 우연히 생겨난 이기적인 변이들만이 진화 과정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것이다. 각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변이의 발생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생명의 진화는 혹독한 자연 속에서 일부 개체라도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변이를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자연에 의해 유전자들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당하는 희생이, 인간에게서는 질병과 노화와 죽음으로 나타난다. 질병과 마찬가지로 노화와 죽음도 변이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우리 몸이 야생에서의 기대 수명에 미칠 만큼만 DNA 복구에 에너지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생식 기능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즉, 적대적인 자연환경에서의 기대 수명은 어차피 제한되어 있기에, 우리는 건강을 챙겨 장수하는 대신 젊을 때 더 많은 자식을 낳고 일찍 죽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개체들 간에 일어나는 약육강식의 생존 투쟁과 사회적 갈등뿐만 아니라 개체 안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비극 역시 궁극적으로 자연의 문제다. 그럼에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경외하고 선망하며, 많은 문제에 대해 인간 자신을 탓하는 가운데 문명의 진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다. 특히, 인간보다 자연을 우선시하는 극단적인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6장 종교: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다

종교는 보수적 성향, 특히 자연에서 도덕과 규범을 찾으려는 인간 본능의 극단적 발현이다. 자연의 창조주에 대한 유일신 신앙의 근간은 성서의 창세기다. 그러나 창조 신화는 자연을 탈 신격화하고 자연신을 숭배하던 고대 원시종교에서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과학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조차 종종 자연주의적 오류에 발목이 잡히며,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 역시 자연주의적 종교로 왜곡되고 제도화되어 그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기에 이르렀다. 구약성서에 담긴 여러 이야기들과 히브리인들의 사회제도, 그리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은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 경제 정의가 실현되고, 혐오와 사회의 낙인으로부터 소수자와 약자가 보호받으며,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성서가 말하는 창조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 즉 자연 세계의 발생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진보적 창조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창조주는 초월적 신이나 조물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다. 성서는 자연의 노예였던 인간들을, (역사적 인물이건 가상의 인물이건) 예수를 본보기 삼아 스스로 신이 되는 해방의 길로 초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은 어떤 절대적인 초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류 공동체로서만 발휘된다.

 

'읽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헌나8 대통령(윤석열) 탄핵  (0) 2025.04.07
성취예측모형  (0) 2024.06.14
인간이란 무엇인가  (0) 2024.05.13
고병권의 "자본" 강의  (0) 2024.05.09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0) 2024.05.01